미셸 “트럼프도 ‘흑인 일자리’ 원해” 꼬집고
‘진보 상징’ 샌더스 “돈으로 선거 살 수 없어”
해리스 남편 엠호프는 유대계 표심에 호소
공화당원·기업인들도 무대 올라 지지 선언
20일(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DNC) 이틀째 행사는 이념을 초월한 ‘반(反) 트럼프 연대’ 출정식과도 같았다. 한 박자 늦게 바톤을 이어받은 해리스 부통령 측이 최대한 빨리 세를 규합해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추월하겠다는 전략을 짠 것으로 보인다.
행사 첫 날에는 여성의 ‘유리천장’ 이슈를 건드리며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과 노동조합 등 민주당의 지지층을 견고하게 다졌다면, 이틀 째인 이날은 지지층의 범위를 확장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밝혔다.
하이라이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해리스 부통령 지지 연설이었다. 민주당은 물론, 미국 정치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로 꼽히는 그는 “우리는 허세와 갈팡질팡, 혼돈을 4년 더 경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 영화를 이미 보았고, 보통 속편은 한층 심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또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며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면 독재자들이 활개를 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될 필요는 없지만, 미국은 선한 힘이 될 의무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을 암시하며 “여기 78세의 끊임없이 불만을 멈추지 않는 백만장자가 있다. 그는 이제 카멀라에게 질 두려움까지 가져 상황이 한층 악화하고 있다”며 “유치한 변명에, 미친 음모론에 거짓말, 심지어 군중 규모에 대한 괴상한(weird) 집착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에 앞서 무대에 오른 전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도 연설 내내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도널드 트럼프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 권력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좁은 세계관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누가 그에게 그가 지금 원하는 일자리(대통령직)가 그 ‘흑인 일자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줄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민자들이 흑인 일자리와 히스패닉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면서 비판을 받았던 ‘흑인 일자리’라는 표현으로 역공을 날린 것이다.
오바마 여사는 이번 대선이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며 “이 나라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더 높이 나가자(go higher). 우리가 과거에 간 것보다 더 높이 가자”고 분위기를 띄웠다.
이날 DNC의 시작을 알리는 시작기도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기반을 둔 유대인 공동체 ‘IKAR’의 랍비(유대교 성직자) 샤론 브루스와 워싱턴DC의 ‘국가모스크’ 이맘(이슬람교 성직자) 탈리브 M. 샤리프 박사가 맡았다. 이 또한 최근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고려한 상징적인 대목으로 꼽힌다.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인 더그 엠호프 변호사도 ‘반유대주의’에 대한 우려를 담은 연설로 유대계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그는 연설에서 해리스 부통령이 유대교 회당에 같이 가는 등 아내 덕분에 신앙이 깊어질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카멀라는 직장 생활 내내 반유대주의와 모든 형태의 혐오를 상대로 싸웠고 그녀는 내가 세컨드 젠틀맨으로서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이(반유대주의와의) 싸움을 이어가도록 장려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유대계 지지층의 이탈을 막는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그는 “카멀라는 ‘즐거운 전사(joyful warrior)’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해왔던 일을 그녀의 국가를 위해 하는 것”이라며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진보 정치인의 상징’으로 꼽히는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도 진보 진영의 결집을 촉구했다. 그는 “너무나 많은 미국인들이 매일의 삶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60%의 미국인이 일당에 목을 매고 있을 때 상위 1%는 전에 없는 부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부자 증세도 안 된다고 하고, 노령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을 확대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샌더스 의원은 “이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한다. 우리는 이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부자들을 정치 과정에서 쫓아낼 것”이라며 “양당에서 억만장자들은 돈으로 선거를 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계 인사로는 켄 셔널트 전 아메리칸익스프레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무대에 올라 경제인들의 지지를 당부했다. 셔널트 전 회장은 “해리스 부통령은 정부가 기업 커뮤니티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며 “해리스 부통령은 모든 미국인을 위해 대통령이 친기업적이면서 동시에 친노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실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공화당 출신의 지도자, 전직 트럼프 정부 관료들도 DNC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해리스 부통령의 정책과 이견이 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면서 각을 세웠다.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스테파니 그리샴은 “트럼프는 공감 능력은 물론이고 도덕과 진실성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2016년 대선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핵심 언론 참모로 일한 그는 백악관 대변인 겸 공보국장을 거쳐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의 비서실장을 지낼 정도의 핵심 측근으로 통했다. 하지만 2021년 1월 6일 의회 폭동사태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등을 돌리게 됐다.
공화당원인 존 자일스 메사(애리조나주) 시장은 “트럼프는 무한한 성장과 제조업의 재탄생, 안전한 국경 등 많은 공약을 내놓았지만 모두 말뿐이었다”며 “나처럼 정치적으로 중도층에게 ‘국가를 우선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역설했다.
이들 외에 게오프 던컨 전 조지아주 부지사, 애덤 킨징어 전 하원의원 등 공화당 소속 인물들과 트럼프 행정부 시기 백악관에서 근무한 올리비아 트로이 전 보좌관도 이번 DNC 기간 중 연설이 예상된다는 현지 보도가 나오고 있다. CNN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헨도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으로부터의 ‘계승’의 의미를 담은 연설도 이어졌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유일한 손자인 잭 슐로스버그(Schlossberg)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횃불이 넘겨졌다”며 “해리스 부통령은 내 할아버지처럼 미국을 믿는다”고 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손자인 제이슨 카터도 “해리스 부통령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며 “할아버지는 해리스에게 빨리 투표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오는 10월 1일 100세가 되는 카터 전 대통령은 흑색종 등 질환으로 투병한 끝에 지난해 2월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