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생태계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어요. 애플은 아이폰과 아이패드 앱을 자체 앱스토어에서만 다운받을 수 있게 하고, 기기나 소프트웨어 간 호환도 맥북이나 애플워치 같은 애플 제품끼리만 잘 되게 만들어 놨는데요. 이런 특성은 ‘폐쇄적 생태계’로 불리며 오랫동안 애플의 팬들을 사로잡은 강점으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한때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애플의 생태계는 최근 들어 독과점 논란을 겪으며 급격히 변화하고 있어요. 유럽연합(EU)이 가장 먼저 애플의 사업 방식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행위라고 판단했고, 미국 정부도 유사한 독과점 행위 지적에 나섰기 때문이죠. 결국 애플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사업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어요.
지난주 애플은 아이폰에서 애플페이 외 결제 방식도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어요. 지금까지 애플페이와 애플월렛 등 자체 결제 방식만을 허용했던 방침을 바꾼 거예요. 애플은 보안 요건을 충족한 앱일 경우 근거리무선통신(NFC)을 활용한 결제가 가능하도록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할 예정이래요. NFC는 스마트폰을 결제 기기에 가까이 가져가기만 해도 결제가 이뤄지는 기술이에요.
삼성페이나 구글페이 같은 결제 서비스도 NFC를 활용하기 때문에 아이폰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에요. 물론 애플 기기에 다른 서비스들을 적용하기 위해선 해당 기업들이 애플과 계약을 체결하고, 일정액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죠. 계약 조건에 따라 빠르게 삼성·구글 페이가 적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이폰의 NFC 활용이 허용될 경우 결제 서비스 외에도 여러 앱을 사용할 수 있게 돼요. 자동차나 집 열쇠, 각종 신분증(ID), 상점 포인트 카드, 이벤트 티켓 등 다양한 앱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고 해요.
다음 달에 신제품인 아이폰 16이 공개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다른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건 올해 4분기쯤일 거라는 예상이 많이 나와요. 다만 우리나라에선 처음부터 이런 서비스를 누리지 못할 것 같아요. 애플은 우선 미국·영국·일본·호주·캐나다·브라질·뉴질랜드 등 국가에서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우리나라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애플이 이런 결정을 한 건 앞서 언급했듯 EU와 미국 등 주요국 정부가 독과점 행위를 지적했기 때문이에요. 지적을 일부 받아들이고 시정에 나서는 모양새인 거죠. 특히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의 독과점 규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EU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어요. EU는 2020년부터 애플페이의 독점적 활용에 대한 조사를 벌여왔고, 애플이 결국 경쟁사의 NFC 접근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조사는 종결됐어요.
이번 조치 외에도 애플은 올해 3월부터 시행된 EU의 독과점 방지 법안인 디지털시장법(DMA)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변화를 발표하고 있어요. 애플은 이달 8일엔 애플 앱스토어 내에서는 꼭 ‘인앱결제’를 하도록 정한 내부 규정을 없애고, EU 지역의 개발자들이 외부 웹사이트로 사용자를 유도할 수 있게 방침을 바꿨어요. 앱 사용자가 애플 앱에서 결제하지 않고, 링크 등을 눌러 다른 곳에서 결제하도록 허용해 준 거예요. 또한 EU 지역 이용자들은 올해 3월부터 애플의 앱스토어가 아닌 다른 앱마켓에서도 앱을 다운받을 수 있게 됐어요.
올해 3월부터 시행된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 DMA)은 대형 IT 플랫폼 기업들이 디지털 시장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하게 견제하는 법이에요. 구글이나 메타, 애플, 아마존 등 주요 IT 기업들은 모두 법 적용 대상이죠.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① 자사 제품 우대 금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검색 결과에 무조건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먼저 띄우는 걸 금지해요. 예를 들어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의 콘텐츠를 구글 검색 결과에서 우선순위로 올라오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의 경우 자체 제작 상품을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할 수 없게 해요.
② 앱 마켓 독점 금지!
애플과 구글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모바일 앱 마켓도 규제 대상이에요. 두 기업은 고유의 앱 마켓을 만들고 여기서만 앱을 내려받도록 유도해 왔어요. 앱 마켓에서 설치한 앱을 통해 소비자가 디지털 상품을 결제할 땐 최대 30%를 수수료로 가져갔죠. 이렇게 높은 수수료율의 ‘인앱결제’는 오랫동안 독과점 논란을 겪었고요. 디지털 시장법은 앱 마켓 독점과 인앱결제 강제를 모두 금지해요.
③ 어떤 앱이든 사용할 수 있게!
디지털 시장법이 시행되면 스마트폰 종류에 상관없이 소비자가 원하는 서비스나 앱을 사용할 수 있게 돼요. 이번에 애플이 발표한 것처럼, 아이폰에서 삼성페이를 쓸 수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또한 제조사가 처음부터 스마트폰에 탑재해 둬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었던 기본 앱도 강제할 수 없도록 해요.
디지털 시장법이 금지하는 대표적인 사항들을 보면, 이미 애플이 어느 정도 대응에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어요. EU 지역 내에 한정된 변화이긴 하지만, 앱 마켓 독점도 완화했고 무조건 강제하던 인앱결제 정책도 포기했으니까요. 이제는 애플페이조차 삼성페이나 구글페이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요.
앞으로도 애플의 폐쇄적 생태계는 더 열릴 가능성이 있어요. EU의 압박에 유럽 지역에서 펼친 개방 정책이 다른 나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애플은 미국에서도 EU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독과점 관련 재판을 받고 있어요. 지난 3월 미국 정부는 약 5년에 걸친 조사 끝에 애플을 독과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어요. 미국 정부도 애플이 자체 생태계 안에서만 앱 다운로드나 결제 등을 가능하게 하고, 타사 기기와의 호환은 제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해요. 이를 통해 애플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는 게 미국 정부의 주장이에요.
애플은 폐쇄적 생태계가 보안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EU에서 이미 비슷한 지적을 받은 상황이라 정부와의 법정 다툼이 쉽지는 않아 보여요. 미국에서도 EU 지역의 개방 정책을 택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이유죠. 미국과 유럽에서 대세가 된 방식은 이후 세계 곳곳으로 퍼질 확률이 높고요. 이미 하나둘 빗장이 풀리기 시작한 애플의 생태계,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세계 최고 IT 기업 중 하나인 애플의 대처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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