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앞에 무력한 인간 그려
능청스러운 연기로 웃음도
내달 17일까지 예술의전당
능청스러운 연기로 웃음도
내달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지난 18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중인 연극 '햄릿'(연출 신유청)은 조승우의 존재감으로 1000석 규모인 CJ토월극장을 가득 채운다. 그의 햄릿이 드러내는 광기는 두 가지다. 모진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물이 고통과 갈등으로 빚은 진짜 광기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하는 가짜 광기.
"그럴 리가요, 폐하.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하다는 숙부 클로디어스(박성근)의 말에 햄릿의 첫 대사가 공연장에 퍼지고, 무대 오른편 층계 뒤에서 5대5 가르마로 이마를 훤히 드러낸 햄릿이 등장한다. 몸을 감싼 코트와 바지,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 창백한 그의 얼굴, 새하얀 코트를 빼입은 클로디어스와 선명하게 대조된다.
180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 동안 조승우는 또렷한 발성과 밀도 높은 표정, 힘차지만 확신이 결여된 몸짓으로 고뇌하는 인간 햄릿을 표현한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아버지인 선왕이 급사한 뒤 어머니 거트루드(정재은)와 결혼한 클로디어스에게 왕위를 도둑맞는다. 부왕의 유령(전국환)으로부터 클로디어스가 부왕을 독살한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분노, 연인 오필리아(이은조)를 향한 연정과 사사로운 사랑에 대한 환멸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다.
햄릿을 가장 괴롭히는 갈등은 복수를 결단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분노다. 부왕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되찾아야 하지만 그럴 힘이 없고 절친한 친구 호레이쇼(김영민)를 빼면 주변엔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뿐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말을 뱉을 만큼 죽음도 두렵다. 조승우는 부도덕한 세상에 대한 분노, 가혹한 운명 앞에서 무력한 자신에 대한 혐오를 탁월한 표현력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세심하게 설계된 무대미술은 위태로운 햄릿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앞뒤 폭이 23m에 달하고 계단으로 소실점을 구현한 무대의 깊이감은 그의 고독과 무력감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대 왼편의 거대한 기둥들은 인간을 압도하는 잔인한 운명을 형상화한 것으로 다가온다.
조승우가 그리는 햄릿의 진짜 광기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발산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재혼하는 패륜을 저질렀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햄릿은 피를 토하듯 증오의 말을 퍼붓는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를 조롱하는 극 중 연극이 끝난 뒤 햄릿이 거트루드를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쏟아내는 장면을 이번 '햄릿'은 길고도 밀도 있게 연출한다. 조승우는 거트루드를 거칠게 몰아세우다가도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지고, 커튼 뒤에 숨은 폴로니어스(김종구)를 살해하는 광기 어린 모습을 애절하게 그려낸다.
연인 오필리아를 향한 햄릿의 광기도 강렬하다. 가혹한 운명을 맞아 사랑의 감정에 환멸을 느끼지만 오필리아를 진정으로 아끼는 햄릿의 양가적 마음이 거친 행동과 대사로 표현된다. 앞서 "별이 불타지 않는다 의심해도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 의심해도, 내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마오"라며 사랑을 속삭였었기에 수녀원에나 들어가라며 오필리아를 몰아세우는 햄릿의 모습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
어두운 복수극인 '햄릿'에서 관객을 웃음 짓게 하는 건 조승우의 가짜 광기다.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끄나풀인 로젠크란츠(이강욱)와 길덴스턴(전재홍), 폴로니어스 등에게 미친 사람 행세를 하는 햄릿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한다. 영화 '타짜' '내부자들' 등에서 대중에게 위트 있는 장면을 선보여 온 조승우는 능청스러운 연기로 관객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이번 공연을 연출한 신유청 연출가는 "햄릿을 '관습과 구질서의 틀 속에 갇혀 있다가 그 순환과 반복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구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새 시대를 욕망하는 인간은 진보와 생존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다. 데뷔 후 첫 연극 무대에 선 조승우의 광기는 변화를 원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절절하게 그린다. 공연은 다음달 17일까지.
[김형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