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공식작전’ 촬영 당시
모로코서 영감받은 회화 펼쳐
현지 전통카펫·한국 탈 오마주
20대때 마음 다잡으려 시작
촬영장서도 틈틈이 그림 작업
영화 ‘추격자’ ‘신과 함께’ 등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겸 영화감독 하정우가 미술 작가로서는 처음 대중 앞에 섰다. 백남준, 이우환, 정상화, 윤석남 등 한국 미술 거장들의 전시가 열린 30여 년 역사의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이 계기다.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 본관에서 열린 개인전 기자간담회에서 하정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불투명했던 내일을 버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았고 어린아이처럼 너무 재밌었고, 그 시간 만큼은 저를 위로해 주는 시간이었다”며 “영화 촬영에 들어갈 때면 호텔방 벽면에 캔버스 천을 걸어 놓고 그림을 그렸다. 2년 전 영화 ‘비공식 작전’을 촬영할 당시엔 모로코에 컨테이너로 재료를 보내 촬영장 옆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수시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초부터는 촬영은 일절 하지 않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실에서 전시 준비에만 몰두했다는 설명이다.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가족 외 누구에게도 말하지마)’란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모로코에서 5개월 간 체류할 때 받았던 영감으로 그린 회화 신작 35점을 선보인다. 모로코 전통 패턴이 새겨진 카펫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긴 카펫 연작과 한국의 전통 탈을 오마주한 마스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제3세계 작가가 그린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에 서로 다른 색의 물감을 섞거나 덧칠하지 않는 채색으로 전체적인 색감에서도 독특함이 느껴진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카펫 연작 ‘무제 Untitled’(2024)는 하정우가 처음 선보이는 200호 대작이다. 아크릴 물감 위에 바늘처럼 가는 유성 펜으로 무수히 많은 선을 세밀하게 그려 패턴을 완성한 작품으로 디테일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하정우는 “모로코에서 카펫 스무 장을 사서 들고 왔다. 온라인으로 카펫 사진이 실린 잡지를 사서 보기도 하면서 이미지를 연상했다”며 “200호 작품에 그린 패턴은 온전히 머릿 속에서 창작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 제목처럼 작가 내면의 은밀한 풍경을 담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하정우는 201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난 10여 년 간 작가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지만 공식석상에 작가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는 “피했다기보다는 쑥스러움이 컸다. 거창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그저 그림에 대한 제 열정과 사랑이 쌓여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던 하정우는 “안 좋은 이야기가 거의 98% 정도 됐다. 그래도 ‘내가 계속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며 “작가로 인정 받고 안 받고는 사실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하정우 작품으로 젊은 컬렉터들을 겨냥한 학고재갤러리는 내년 4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엑스포 시카고’에서도 하정우를 메인 작가로 앞세울 계획이다. 하정우로서는 첫 해외 전시다. 하정우는 “배우 활동도 (제작진의) 선택을 받아서 하는 것처럼 제가 운 좋게 (갤러리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는 “하정우 작가는 미술시장의 외연을 넓히고 K아트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며 “지난 10년간 작업을 지켜보고 내린 결정이다. 당장 전속 계약을 논의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번 개인전을 단발성 전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20대 중반부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등 거장들 작품과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배웠다”며 “나한테는 이분들이 그림을 가르쳐 준 ‘형님’들”이라고 말했다. 미술 교육을 받아볼 생각도 있냐는 질문에는 “대학원 진학을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 ‘한 달 살기’ 같은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