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쌍둥이 자녀를 둔 지인이 중국 연변 출신의 50대 가사도우미를 채용했다. "쌍둥이는 비용을 더 줘서 힘들겠다"는 물음에 "너무 만족하고 있다"며 얘기를 꺼냈다. 애초 유치원 등·하원과 간식 챙기기 등 기본적인 일만 하기로 계약했는데, 점차 아이들의 책 읽기와 생활습관, 예의까지 개선됐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가사도우미는 중국에서 2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간단한 중국어 대화와 단어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이후 가사도우미가 그만두지 않도록 월급을 올려주고, 명절이면 보너스까지 챙겨줬다. 그 참에 지인도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다음달 처음 시행된다. 하루 8시간 근무에 비용이 238만원이어서 서민 가정은 부담이 만만찮다. 선정 가구의 40%가량이 강남권에 집중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로 아이 돌봄 관련 업무를 하고, 성인을 위한 음식 조리나 쓰레기 배출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가사관리사의 영어 실력에 유독 관심이 많은 듯하다. 이들은 필리핀 정부가 공인한 돌봄 자격증 소지자로 영어가 유창하다고 한다. 물론 기본적인 한국어도 공부했다. 지난 6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32세 관리사는 인터뷰에서 "저는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했습니다"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한국어 발음도 놀랍지만, 눈매에 가득 찬 자신감과 총기가 인상적이었다. 돈을 벌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필리핀의 대졸자 비율은 61%로 대졸 평균 초임은 1만8943페소(약 45만원)다. 한국의 고물가를 고려해도 여기서 번 돈으로 대학원에 갈 수준은 될 것이다. 돌봄 업무가 시작되면 "그냥 영어로 말씀하시라"는 가정이 많지 않을까. 내년 사업이 본격 확대되면 보너스까지 챙겨주며 영어 잘하는 '필리핀 이모님'을 모시려는 가정도 나올 것 같다. 저출생 해결을 위해 육아에 도움을 주고자 도입한 제도가 자칫 '영어 선생님' 사업으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서찬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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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필동정담] 필리핀 이모님, 선생님?
- 입력 :
- 2024-08-19 17:39:18
- 수정 :
- 2024-08-19 23: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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